마산사보이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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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작가 조회 0회 작성일 2021-05-17 18:27:4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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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호텔 사건의 전말 ) 마산주먹 구달웅 님의 절친이된 조양은 님의 보스 [ 무교동 조창조 님 ]

조양은님의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은 실은 신상사파에게 아무런 견제도 되지않았다.
되려 그사건으로 인해 심려끼친 부분에 훗날 조양은님은 정식으로 사과를했다.

문제는 조양은님의 사건으로 신상사파가 무너진것이 아닌,
조직세계간의 룰을 무너뜨리고
그동안 잠잠했던 서울시내의 주먹들을 수면위로 드러내며
영.호남일대의 주먹들을 서울로 불러드린 계기가 돼 세대교체의 전환점이 되어 전국시대를 초래 했던것 이다.

당시,조직계의 룰을 확립하고 체계적으로 운영관리 하는곳은 서울 전체에서도 신상사파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명동에는 신상사파가 무교동에는 조창조님이 장악하고 있었다
무교동은 유흥업소가 많았고,
조창조님一정학모님一오종철님一조양은님 으로 이어지는 무교동은
유흥업소가 필요로 하는 모든 재료의 공급 권을 틀어쥐고 화려한 시절을 맞고 있었다.

겨울에는 기름을,여름에는 얼음을 공급했고 술과 안주 일체에 대한 독점 공급 체제를 확립했다.
조창조님은 대구 주먹이었고 정학모님-오종철님-조양은님은 호남 주먹이었으니
무교동은 영남과호남 주먹의 연합세력이라 할만했다.

당시만 해도 명동과 무교동의 보스급 인물들은 서로의 얼굴조차 잘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 세력의 생존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창조님이 거느렸던 무교동 세력은 유흥업소 장악이 중심 비즈니스였다.
나이트클럽과 대형주점의 영업권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수입을 거둬들였다.

명동 신상사파는 유흥업소와의 관계설정이 무교동과는 확연히 달랐다.
업소를 수익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건달은 술집에서 잘나가는 손님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 신상사파의 전통이었다.
요컨대 술집은 돈을 쓰는 곳이지 벌어들이 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명동의 유흥업소 입장에서 신상사파와 제휴한다는 건 거대한 VIP 손님을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신상사파 명동 주먹 구성원은 상 당수가 명문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고
부유한가정 출신이 많아 돈에 목매는 일이 다른 조직 에 비해 훨씬 드물었다.
이 같은 전통은 먼 훗날,
노태우 대통령이 소위 ‘범죄와의 전쟁’을 벌일 때 명동파의 피해를 극소화하는데 기여했다.
대조적으로 전국각지의 조직들은 그때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복구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시 명동 신상사파는 전국에 산재한 관광호텔의 카지노나 나이트클럽을 운영했다.
일본에서 밀항한 야쿠자 중간보스이자 프로복싱 프로모터 서순종(니시야마)님 영입 이후에는
야쿠자 조직원의 서울 체류와 관광을 도 맡으며 이 사업도 상당한 수입원이 됐다.

명동 신상사파의 원래 본거지는 명동 태극당 앞 수다방이었다.
일본 야쿠자 조직원들이 한국에 자주 찾아오면서 그들이 숙박할 호텔을 물색하게 됐다.
수다방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사보이호텔이 위치하고 있어 이곳을 가장 즐겨 사용하게 됐다.
이후,사보이호텔은 신상사파 와 막연한 관계를 유지했다.

명동 신상사파는 사보이호텔의 VIP 고객이 됐다.
야쿠자 조직원이 한국에 오면 호텔 몇 개 층을 전세 내 일주일씩 머물다 가곤 했기 때문이다.
외상 거래를 하거나 결제를 미룬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호텔 측은 그래서 신상사파를 우대했다.

당시 서울에는 노남희님 이라는 유명한 사기꾼이 있었다.
그가 신상사파 에 영입된 서순종님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였다.
서순종님은 일본 야쿠자 이 나가와카이(備川會)의 시부야 이키쇼조의 보스를 지낸 거물이었다.

모종의 범죄행위에 가담해 실형을 받고 형 집행정지 상태에서 한국으로 밀항해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일본 사법당국에서도 그를 놔두지 않았겠지만,조직에서도 그를 파문했다.
조직의 허락 없이 밀항을 결행한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업 수완이 대단했다.
서순종님의 실력과 빠른 적응력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서순종님은 한국으로 밀항한 이후 많은 돈을 벌었다.
명동 신상사파와 연합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의 사업들은 신상사파의 2인자 구달웅님의 도움없이는 결코 성사될수 없었다.

이후,서순종님은 명동 신도호텔을 리모델링해 일본 관광객 전용 쇼핑센터로 만드는 작업을 추진 중이었다.
야쿠자들과 여전히 끈이 닿았기 때문에 그 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터였다.

그 리모델링 공사를 수주한 사람이 노남희님 이었다.
그는 공사를 수주 하고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도 공사를 차일피일 미뤘다.
격분한 서순종님이 시 공사를 바꾸려 하자 노남희님은 서순종님의 마음을 돌리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서순종님을 납치해 사보이 호텔에 감금했다.
아마도 협박반,설득반으로 마음을 돌리 려고 했을 것이다.

당시 노남희님의 이런 작업에는 무교동 세력이 깊이 개입 돼있었다.
신상사파 조직원들이 서순종님을 구하려고 사보이호텔로 올라갔다가 린치를 당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린치를 가했던 장본인은 조창조님의 직계로 무교동의 ‘에이스’라 불렸던 이경원님 이었다.
경희대 체대 출신으로 역도와 복싱으로 단련된 그의 완력은 무시무시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상사파는 격노했다. 바로 구달웅님과 그의 직계 정경식님을 투입해 서순종님 구출작전을 벌였다.
구출은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무교동 에이스 이경원님은 사보이호텔 주차장에서
구달응님과 정경식님에게 거의 초주검이 될 정도로 얻어맞았다.
무교동 측은 믿었던 에이스 이경원님이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사보이호텔의 참극은 이 사건이 가까운 원인으로 작용했다.

무교동 세력은 서순종님 납치 사건에 대해 신상사 측에 사과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975년 1월 2일 오후1시 그 사과를 받기 위해 신상현님,구달웅님,신상현님의 매제 김수일님 등 명동파의 핵심 실세가 사보이호텔 1층에 대기하고 있었다.
오후 2시가 되도록 무교동 식구들이 나타나지 않자
신상현님과 구달웅님은 자리를 떴다.그 사이 조양은님의 지휘를 받은 행동대 3인이 호텔에 난입해
회칼과 야구방망이를 휘두른 것이다.

현장은 참혹했다. 신상현님의 매제 김수일님은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맞아 피가 솟구쳤다.
장시간의 뇌수술을 받아 겨우 소생했지만 이후 그는 심각 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무교동 세력의 제1 타깃은 구달웅님 이었다.
이경원님을 초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그렇지만,명동파를 실질적 으로 움직이는
구달웅님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향후 세력 확장이 여의치 않을것으로 판단했다.

그날 마침 유명한 호남 주먹 ‘번개’ 박종석님을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그 자리에 앉게 된 목포 출신의 한 건달이 구달웅님으로 오인을 받아 온몸을 회칼로 난자당했다.
그도 급히 성모병원에 옮겨져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사보이호텔 사건의 전개과정은 무교동과 조양은님의 예측대로 굴러 가지 않았다.
명동 세력의 힘은 무교동이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타격을 가한 쪽이 오히려 피해 다녀야 하는 역설적인 일이 벌어졌다. 무교동 식구들은 현장에서 일제히 사라졌다.

사보이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는,명동 세력의 무서운 추격전이 개시되었다. 무교동은 일순간 공동상태가 됐다.
그러나 명동 세력의 입지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우선 주먹세계의 법도가 달라졌다.
회칼 등 소위 ‘연장’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조양은님은 사보이호텔 사건으로 경찰과 신상사파의 추격을 받는 신세가 되었지만
서울의 밤거리는 그야말로 폭력의 강도와 잔인함이 세력의 판도를 결정하는 카오스의 상태로 치달았다.
신상사파에 의한 명동 평화시대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선 후배 간의 존경심이 사라지고 이익만을 쫓는 이합집산이 횡행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을 보호해야 내가 보호받는다"는 스포츠계와같은 불문율의 룰은 건달세계에서는 더 이상 통할수없게 됐다.

이 사건이 주먹계에 남긴 지울수없는 상처였다.

사보이호텔 사건 이후로 조양은님은 끈임없이 피신함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해 양은이파를 결성했고
이외 서울에는 이동재님이 이끄는 OB동재파와
김태촌님이 상경한 범서방파가 신흥세력으로 급부상한다.

사보이호텔 사건의 심각한 후유증이 봉합되기까지는 3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됐다.
조창조님이 구달웅님과 만나 신상현님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조창조님은 신상현님을 만나 사보이호텔 사건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두 거물은 구원에 종지부를 찍고 화해키로 합의했다.

하지만,
조창조님이 신상현님을 찾아 왔다는 소식을 듣자 신상현님의 매제 김수일님의 뇌리에는 3년 전의 치욕이 되 살아났다.
조창조님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그는 서울중부서 형사를 불러 신상현님과 화해한 조창조님을 체포케 했다.

이에,구달웅님이 중부서에 달려가 형사들을 만났다.
중부서 수사과장은 이번에 조창조님이 들어가면
최소한 7년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화해한 건달을 다시 형무소에 가둔다는 것은 사나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앞으로 7년을 보지 못할 터인데,초밥 이라도 한번 먹이고 싶다고했다.
구달웅님은 경찰서 옆 초밥집에서 형사 3명에게 양주 8병을 먹여 만취를 유도했다.
원래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조창조님은 형사들이 술에 취한 사이 그 자리를 빠져나올수 있었다.

사보이 호텔 사건의 구원을 잊고 구달응과 조창조는 그렇게 친구가 됐다.

저 하늘 별을 찾아. 사랑아 / 민정아 메들리 (마산 사보이 호텔)



마산 인물열전4 ) 명동을 집어삼킨 마산의 주먹 [ 신상사파 부두목 구달웅 어르신의 생애 ]

신상사파의 2인자 구달웅님의 고향은 경남 마산이다.
부친은 일제시대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셨고
모친은 이름이 잘 알려진 당대의 명창, 미인이셨다 한다.
하지만 부모님 모두 구달웅님이 어린나이에 돌아가시면서
6·25사변 직후 창원의 고아원 ‘평화원’에 어린 몸을 의탁해야만 했다.


당시 평화원은 부패의 온상이었다.
구호단체에서 위문품을 보내면 잔뜩 사진만 찍고 정작 원생들에게는 하나도 지급하지 않았다.
결국 평화원 원생 30여 명이 창원 군청에 몰려가 “배가 고파 못 살겠다”며 항의시위를 벌였고
분노를 참지 못한 구달웅님은 원장을 구타했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부산과 거제도 사이 가덕도의 고아원이다.
이곳은 대한민국 전체 고아원 원생 중 큰 사고를 친 ‘전국구 문제아’들이 유배되는 곳이었다.
서울에서 가덕도 고아원으로 내려온 한 친구가 구달웅님께 싸움의 기술을 전수했다.
‘싸움은 두뇌가 아홉, 완력이 하나’라는 요령을 가르치며 약자는 절대 건드리지 말고,
오만한 강자와는 굴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싸움의 철학을 새겨 주었다.

20대 초반 구달웅님은 다시 마산으로 돌아오면서 주먹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당시 마산은 북마산·신마산·구마산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신마산은 항만이 있어 외항선이 들어왔고,
북마산은 별로 볼 게 없는 주택지역이었다.
구마산은 오동동을 중심으로 기생집 등 유흥업소가 즐비했다.

1960년대에는 오동동과 동성동 골목을 통칭해 오동동으로 불렀다.
마산 근해 어항의 중심지로 이 선창가엔 기생집과 함께 장어국, 추어탕, 생선구이를 파는 선술집이 많았다.
구달웅님은 마산에서 가장 번화했던 오동동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구달웅님의 조직관리 원칙은 “건달도 반드시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속칭‘동생’들에게 하다 못해 선술집이라도 운영할 것을 종용했다.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중에 구달웅님이 마산에서 벌인 사업은 기름장사였다.
당시 마산의 기름은 거의 전부가 해군 군용 기름을 빼돌린 것으로 충당됐다. 군도 부패했지만 관도 거기에 합세했다.

구달웅님은 당시 시청과 협의해 군용 기름의 배급권을 달라고 했다.
시장과 세무서장, 보건소장까지 힘을 합쳐 구달웅님의 사업을 돕는 대신
구달웅님께 ‘새마산 시민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요구했다.
동네에서 상인들을 협박해 푼돈이나 뜯는 깡패·양아치들을 일소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다방엔 난로 옆에 앉아 몇 시간이고 죽치는 군상들은 거의 100% 깡패,양아치 였다.
구달웅님이 기름장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니 이곳 저곳을 비롯해 다방주인들 에게서도 기름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구달웅님이 기름을 들고 나타나니 동네 양아치들은 혼비백산 도망을 쳤다.
기름이 충분히 있어도 건달들을 쫓기 위해 주문하는 술집·다방 주인이 늘어났다.
‘새마산 시민운동’이 저절로 이뤄진것이다.

그렇게 구달웅님은 오동동을 넘어 구마산 지역을 장악했다..
같은지역의 주먹 선배들도 많았지만 북마산과 신마산 건달들은 구달웅님이 버티고 있었터라 구마산 지역에는 올 수가 없었다.
그때 구달웅님이 먼저 북마산과 신마산 선배들을 찾아가 마산 주먹세계의 통합을 주도하며 ‘나와바리를 트자’고 제안했다.
구달웅님의 통 큰 행보에 선배들은 신뢰했고,
그때부터 구달웅이란 이름이 마산·창원 지역 뿐만 아닌 경남 지역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다.

5·16군사정변이 터진 후 마산의 주먹세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현역 군인이 경찰서장으로 부임했는데..
울산경찰서에서 형사로 근무하던 자신의 외삼촌을 강력계 계장으로 승진시켜 마산으로 데려와 자신의 오른팔로 삼고
상인들을 대상으로 숱한 상납금 수수와 갈취를 하기 시작했다.

술집과 요정에서의 정기 상납금은 물론이며, 불법도박
묵인해주는 댓가로 도박꾼들에게도 상납 받았고
건달들을 협박해 구속을 피하려면 돈 내라고 겁탈했다.심지어 구두닦이에게도 돈을 상납받았다

결국 구달웅님에게도 마산을 떠나라는 최후 통첩장이 날아들었다.
경찰서장과 강력계장이 구달웅님을 찾아와 오늘 안으로 마산을 뜨지 않으면 마산 조직원 모두를
내일 아침 일망타진하겠다고 협박했다.
동생들을 걱정했던 구달웅님은 그렇게 그날 밤 마산에서 삼랑진을 거쳐 서울로 올라갔다.

구달웅님은 서울에 온 것을 계기로 건달 생활을 청산하려 했다.
당시 서울에서 청와대 경호계장을 맡고 있던 부산친구의 도움을 받아 청와대로 출근해 강세희님의 경호를 맡게되었다.

강세희님은 서울고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엘리트로 5·16 군사정변 이후 군납업에 투신하여 큰돈을 벌었다
자유당 때나 3공화국 시절, 군납업은 굉장히 큰 이권이었고
특히 미군을 상대로 여러번의 입찰에 성공하며 군납업계의 큰손으로 거듭났지만
라이벌 군납업자의 권총 저격으로 척추를 다쳐 휠체어를 타야 하는 불구의 몸이 되버렸다.

강세희님은 돈이 많았지만 불구가 된 후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그로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주위사람을 거북하게 하는 행동을 많이했다.
허나,군납업이 워낙 큰 이권이 걸려 있던터라 주먹계의 영향도 크게받아 그는 명동의 대부였던 신상현님과 친분이 두터웠다.
신상현님은 구달웅님을 보며 배짱이 두둑하고, 싸움의 기술이 탁월하며,
육체적인 매력도 넘치는 이 마산 사나이를 곁에 두고 싶어 했었다.

신상현님과 구달웅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신상사와 구달웅의 화려한 명동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마산 주먹 구달웅님이 신상현님과 손을잡은 후 명동은 사실상 구달웅님이 관리했다.
명동을 그에게 물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업 오너가 경영 전문 CEO를 영입해 회사를 맡기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지방의 큰 조직과의 관계나 일본 조직과의 연계 등 굵직한 가닥의 일은 신상현님이 관여했지만
조직원들의 살림은 구달웅님이 전부 도 맡았다.
그렇게 구달웅님을 등에엎은 신상사파는 오랫동안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대조직으로 군림할수 있었다.

조양은님의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 

#마산사보이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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